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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예술혼 (살림지식총서 594)
백형찬 지음 | 2021년 12월 10일
브랜드 : 살림지식총서
쪽수 : 208 쪽
가격 : 6,800
책크기 : 120*190
ISBN : 978-89-522-0096-9-04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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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화가들의 삶과 예술
그들이 들려주는 소중한 메시지
조선이 낳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들려주는
삶과 예술 이야기
조선 시대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딱딱한 전문서에서 탈피, 에세이 형식으로 쉽게 풀어쓴 이 책은 32명 화가들의 작품과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술가에게 시련과 역경 그리고 고난은 운명처럼 따라다닌다. 그것은 가난일 수도 있고, 고독일 수도 있고, 병일 수도 있다. 예술가의 길은 멀고도 험하며 그 길은 피와 눈물과 땀을 요구한다. 그 고난의 길을 갔기 때문에 훗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갔기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을 붓으로 노래한 화가, 조선 최초의 프로페셔널 화가, 조선 제일의 스토리텔링 화가, 조선의 다빈치 화가,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화가, 조선을 문화대국으로 만든 화가, 조선 시서화 삼절의 화가, 조선 최고의 인물화가, 조선 최고의 묵장화가, 조선 최고의 묵죽화가, 조선 종실 출신 화가, 조선 선비 출신 화가, 조선 노비 출신 화가, 서른에 요절한 천재 화가, 신선이 된 화가 등 조선 오백 년 동안 수많은 화가들 중 특별한 삶과 예술 세계를 펼친 화가들을 만나본다.

조선을 붓으로 노래하다
전국을 유람하며 풍경을 기록한 정선
정선의 은 단발령에 서서 금강산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자신이 한 마리 새가 되어 단발령과 금강산을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단발령은 금강산 초입에 있는 고개이다. 신라 마의태자가 나라를 빼앗기고 그 설움에 아버지 경순왕에게 하직하고 출가를 결심하고 바로 금강산으로 입산해 단발령에서 삭발했다고 전해진다.
그림 속의 사람들은 정선 일행이다. 그는 서른이 훨씬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금강산을 구경했는데 평생 친구였던 김화 현감 이병연이 겸재를 금강산으로 초대한 것이다. 그가 화가로서 이름을 크게 떨친 것도 금강산을 그리면서부터였다.
정선은 숙종 때 서울에서 태어나 영조 때까지 활동했다. 당시 대단한 권력가였던 안동 김씨 형제들)의 후원으로 그는 평생 벼슬을 하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는 우리 강산을 무척 사랑해서 전국을 유람하며 그 시대와 풍경을 그림으로 기록했다. 조선 화가 중 가장 많은 그림을 그린 사람이 정선이 아닐까 싶다. 그는 평생 금강산을 눈에 담고 살았다고 한다. 금강산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정선의 그림을 ‘실경산수’라 하지 않고 ‘진경산수(眞景山水)’라 한다. 진경산수는 중국의 화풍을 배제하고 우리 눈으로 우리 강산을 직접 보고 느낀 그대로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 진경산수에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도 들어가 있지 않고 순수하다.

정조가 꿈꾸던 태평성대를 그리다
풍속화가 김홍도
김홍도의 은 그냥 조선 시대 풍속을 그린 그림이 아니다. 양반과 상민 그리고 어른과 아이의 신분이 엄격했던 조선 시대에 이 그림은 파격적이었다. 신분제도를 없애고자 노력한 정조의 생각을 김홍도가 그대로 그림에 담은 것이다. 정조는 온 나라 백성이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원했다. 그리고 정조가 꿈꾸던 태평성대를 김홍도는 풍속화 작품으로 완성해냈다. 그래서 그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웃음을 머금고 통통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런 김홍도를 정조는 끔찍이 아꼈다고 한다. 김홍도는 임금의 초상화를 두 번씩이나 그렸다. 한번은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의 어진을 그렸고, 또 한 번은 정조의 어진을 그렸다. 그리고 정조의 어진을 잘 그린 공로로 충청도 연풍 현감이 되기도 했다.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고 그림으로 현감 벼슬을 얻은 것이다. 어진은 조선에서 그림을 제일 잘 그리는 도화서 화원이 그렸다. 그들을 어용화사라 했는데 이것은 최고의 명예였다.
도화서 화원이 된 김홍도는 그곳에서 조선 미술사에 길이 남을 명작들을 줄줄이 그려 조선의 르네상스를 활짝 열었다. ‘청은 남에서 나나 남보다 푸르다’라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을 제대로 보여준 것이다.

그림에 취한 신선
세속에 얽매이지 않은 예술가 장승업
안견, 김홍도와 함께 조선 3대 화가 중 한 사람인 장승업은 고아로 자랐고, 훌륭한 스승 밑에서 제대로 된 그림 공부를 받아본 적도 없다. 안견에게는 안평대군이라는 권세가가 있었고, 김홍도에게는 강세황이라는 훌륭한 스승이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문화적으로도 꽃 피던 시대에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장승업은 조선 말기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쇠퇴해가는 국운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는 예술가로만 살았다. 세속적인 것에는 일절 얽매이지 않았다. 돈과 벼슬을 하찮게 여겼다. 그의 그림값은 모조리 술값으로 나갔다. 술을 좋아해서 그림을 그리려면 반드시 그 옆에 술병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자신의 호를 ‘취명거사’라 했다.
그의 작품 를 보면 커다란 나뭇가지에 두 마리 독수리가 앉아 있다. 한 마리는 몸을 활처럼 잔뜩 구부리고 먹이를 노려보고 있다.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 그리고 이글거리는 눈빛. 이 모두가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상이다. 다른 한 마리는 먹이에 전혀 관심이 없다. 달관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장승업이 현실 세계와 이상 세계를 대비시켜 그린 것이 아닐까? 그림은 세상살이는 두 가지 눈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준다.

조선 진경산수의 마지막 작품을 그리다
도화서 화원 안중식
안중식은 고종 때 활동한 조선의 마지막 도화서 화원이다. 그는 고종의 어진과 황태자의 어진을 그렸다. 안중식의 스승은 장승업으로 그는 스승의 전통적인 화풍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의 작품 는 백악산 밑 봄날의 새벽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그의 는 작품이 두 개이다. 하나는 여름을 그렸고 다른 하나는 가을을 그렸다. 그런데도 두 작품 모두 제목을 라 붙였다. 봄 그림이 아닌데 왜 그렇게 봄을 강조했을까?
그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1915년으로 이미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때였다. 오백 년 왕업을 이어온 조선왕조가 슬프게도 막을 내리는 시기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의 새로운 봄날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제목을 붙인 것이 아닐까.
이 그림은 조선 진경산수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큰 화면에 조선의 디테일을 가득 담았다. 멀리 북한산이 보이고 그 앞으로 백악산이 우뚝 솟아 있다. 산과 산 사이에는 거대한 구름이 도도히 흐르고, 경복궁은 의젓하고 경건하다. 근정전을 비롯해 강령전, 경회루가 질서 정연하게 보인다. 그 앞에는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남쪽 문인 광화문이 있다. 그는 광화문의 모습을 위용 있게 표현했다. 광화문을 ‘조선이 있다고 자랑하듯’ 조선왕조의 마지막 화원으로서 종묘사직에 목숨을 바치듯 를 그렸다.
의 선비화가, 인제 강희안
아, 〈몽유도원도〉, 현동자 안견
노비 출신 도화서 화원, 학포 이상좌
조선의 빛을 그리다, 신사임당
조선 최고의 묵죽화가, 탄은 이정
열세 살에 장안사 벽화를 그리다, 나옹 이정
조선 종실 출신 화원, 허주 이징
그림 속에 들어있는 귀신, 취옹 김명국
조선 제일의 선비 화가, 공재 윤두서
붓으로 우리 강산을 노래하다, 겸재 정선
조선 최고의 인물화가, 관아재 조영석
스승 겸재를 뛰어넘다, 현재 심사정
조선 선비의 상징 〈설송도〉, 능호관 이인상
조선 시서화의 삼절, 표암 강세황
조선 최초의 프로페셔널 화가, 호생관 최북
‘國手’라 불리다, 화재 변상벽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단원 김홍도
스펙터클 〈강산무진도〉, 고송유수관도인 이인문
조선을 문화 대국으로 만들다, 정조
김홍도와 백중하다, 긍재 김득신
조선 제일의 스토리텔링 화가, 혜원 신윤복
조선의 다빈치, 다산 정약용
조선 그림의 신, 소당 이재관
오, 〈세한도〉, 추사 김정희
조선 묵장의 최고봉, 우봉 조희룡
조선 불화의 전설, 금암당 천여
추사와 초의를 스승으로 모시다, 소치 허련
조선 묵란화의 거장, 석파 이하응
서른에 요절한 천재 화가, 고람 전기
그림에 취한 신선, 오원 장승업
‘노근묵란’의 삶, 운미 민영익
조선의 마지막 화원, 심전 안중식
캄캄한 밤, 험하고 가파른 벼랑이 있다. 그 벼랑 중간에 기가 막히게 멋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소나무는 용이 하늘로 막 승천하려는 모습 같기도 하고, 자신을 맘껏 자랑하려고 춤을 추는 듯하며, 어떻게 보면 손과 다리 그리고 목이 직각으로 꺾어진 좀비의 무서운 모습 같기도 하다. 더구나 소나무 가지에는 넝쿨이 여기저기 달라붙어 바람에 흔들려 을씨년스럽기조차 하다. 정말 기기묘묘한 소나무다. 그 소나무 위로는 둥그런 달이 휘영청 밝게 떠 있다. 소나무 아래에는 한 선비가 거닐고 있다. 뒤따르는 동자는 선비의 지팡이를 들고 있다. 이상좌는 로 안견 이후 조선 전기의 최고 화가로 인정받았다. (노비 출신 도화서 화원, 학포 이상좌)

어렸을 때, 다락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에 몰두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리하여 사흘이 지났다. 집안에서는 아이가 사라졌다고 난리가 났다. 사흘 동안 집안 곳곳은 물론 온 동네를 찾아다녔다. 그래도 아이를 찾을 수 없었다.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포기했을 때, 이징이 다락문을 열고 나왔다. 가족들은 기가 막혔다. 찾았다는 기쁨과 함께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버지가 매를 들고 마구 때렸다. 그러자 이징은 울면서 눈에서 떨어져 나오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찍어서 새를 그렸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만 이징의 그림 소질이 하늘로부터 타고났음을 말해준다. (조선 종실 출신 화원, 허주 이징)

윤두서의 에는 그 시대의 역사와 조선 선비의 맑은 정신 그리고 예술가의 뜨거운 예술혼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국보가 되었다. 화가는 자신이 가장 고독하다고 느낄 때 자화상을 그린다.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친한 벗 고갱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을 때 을 그렸고,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는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을 때 을 그렸다. 공재 윤두서도 마찬가지다. (조선 제일의 선비 화가, 공재 윤두서)

한 폭의 이인상 초상화가 전해진다. 깨끗한 상태로 보존되어 그의 모습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림 오른쪽 위에 ‘凌壺 李麟祥 先生 眞’이라 적어놓아 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이인상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짙은 눈썹, 어진 눈매, 반듯한 코, 큰 귀, 과묵한 입술, 가지런한 수염 그리고 바르게 갖춰 입은 의관 등 모든 것이 어우러져 조선 선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문신이자 성리학자였던 오희상은 이인상을 맑고 빼어나며 홀로 우뚝하여 세속을 멀리한 ‘마른 학’과 ‘긴 대나무’에 비유했다. 마른 학과 긴 대나무는 조선 선비의 상징이다. (조선 선비의 상징 , 능호관 이인상)

이 그림은 먹으로 여러 송이의 국화를 그렸는데 성정이 흐린 사람은 감히 가까이 범접할 수 없는 높은 기품을 지니고 있다. 또한 국화 꽃잎 한 장 한 장을 무척이나 섬세하고 디테일하게 그려 마치 신사임당의 를 보는 듯하다. 국화는 사군자 중 하나로 다른 꽃들이 모두 시든 늦가을에 탐스런 꽃을 피우고 은은한 향기를 풍긴다. 정조는 이러한 국화의 기품을 이 그림에 그대로 담았다. (조선을 문화 대국으로 만들다, 정조)

무대에는 푸른 산이 있고 그 밑으로 맑은 강이 흐른다. 배 한 척이 떠 있다. 배에는 양반 셋과 기생 셋 그리고 뱃사공과 피리 부는 소년이 있다. 기생들은 악기를 불고 담뱃대를 물고 손을 강물에 담그고 있고, 양반들은 기생에게 흠뻑 빠져 있다. 녹음이 짙은 것을 보니 여름 풍류를 즐기러 나온 듯하다. 강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고, 피리 소리와 생황 소리가 들리고 배는 천천히 움직인다. 간혹 새소리도 들린다. 그림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늦바람에 피리 소리 들리지 않고 갈매기만 물결 위를 한가로이 나는구나(笛晩風聽帗得 白鷗飛下浪花前).” 신윤복은 바람 난 양반들의 행태를 그림과 시로 날카롭게 비판한 것이다. (조선 제일의 스토리텔링 화가, 혜원 신윤복)

조희룡은 여항인(閭巷人)으로 문인화를 전문적으로 그렸는데 여항은 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다. 조선은 사대부 문학이 주류를 이뤘는데 중인들이 따로 여항 문학을 만들었다. 조희룡은 여항 문인 화가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대부 집안의 후손이었지만 집안의 조상들은 낮은 벼슬살이를 했다. 그래서 그는 사대부 정신을 지녔지만 여항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독특한 예술 세계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오세창은 조희룡을 ‘묵장영수(墨匠領袖)’라 했다. 붓과 먹을 다루는 예술 세계에서 최고봉으로 극찬한 것이다. (조선 묵장의 최고봉, 우봉 조희룡)

민영익의 은 목숨이 경각에 달한 조선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선비의 심정이 그대로 담긴 그림이다. 그의 또 다른 난초 작품으로는 가 있다. 이 작품은 끔찍하게도 뿌리가 뽑힌 난초를 표현했다. 미술평론가 오주석 선생은 이 그림을 중국 상해에 망명 중이던 민영익이 한일합병조약 소식을 듣고 망국의 슬픔을 못 이겨 뿌리가 뽑힌 난초를 그렸는데 그림의 난꽃은 눈물에 흠뻑 젖은 눈과 같다고 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주석 선생의 말이 옳다. 난꽃은 눈물을 머금고 있다. 민영익은 술을 마시며 세월을 보내다 결국 뿌리 뽑힌 난초(露根蘭)처럼 삶을 끝내고 말았다. (‘노근묵란’의 삶, 운미 민영익)

야나기 무네요시가 표현한 대로 안중식은 광화문을 ‘조선이 있다고 자랑하듯’ 그렸다. 그 앞에는 해태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왕궁을 무섭도록 지키고 있다. 안중식은 벽돌 하나하나, 기와 한 장 한 장을 세어가며 그렸다. 그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화원으로서 종묘사직에 목숨을 바치듯이 를 그렸다. 그림을 보니 문득 이상화의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라는 시가 떠오른다. 안중식은 이 그림을 그리고 4년 후 쉰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의 마지막 화원, 심전 안중식)